허지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잘난 척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독선적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가 쓴 글은 한 번에 읽히지 않았고, 불쾌했다. 그런데, 이 책은 두근 거리며, 단숨에 읽었다. 한 번 더 아껴가며 천천히 곱씹으며 읽기도 했다. 사람은 반드시 아파야 성숙해지는 건가?
좋은 문장으로 가득 찬 책이지만, 그중에서 다섯 문장을 뽑아 보았다.
1. 우리의 삶은 남들 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 과연 그럴까? 발달된 SNS와 각종 미디어 덕분에 우리는 예전보다 더 쉽게 다른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내 기준에 좋은 것에 눈이 가게 되고, 좋은 것을 보며 느끼는 부러움은 불편한 자격지심으로 연결되었다. 그들의 멋진 삶에 비하면 내 삶과 내가 이룬 것들은 왠지 미흡하고, 부족하며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마음이 자기 비하와, 열등감까지 이어진다면…. 이거 낭패다.
- 지웅씨는 아니란다. 이 문장부터였을까? 내가 지웅 씨에 대한 마음이 바뀐 건?
2. ‘함께 버티어나가자’라는 말을 좋아한다. 삶이란 버티어내는 것 외에는 도무지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 이혼을 하고 난 후 여러 안 좋은 감정에 시달렸다. 그런 불쾌한 느낌은 지금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성취를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내 나름대로 구속감과 죄책감을 떨치고 ,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도, 모든 걸 놓아 버리고, 깨지 않는 잠에 들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도 버틴다. 속은 문드러지지만 버틴다. 정말 이 방법밖에 없는 걸까?
3. 불행의 인과 관계를 선명하게 규명해보겠다는 집착에는 아무런 요점도 의미도 없다. 그건 그저 또 다른 고통에 불과하다.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운명 이야기가 아니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괜찮다. 찾을 수 없는 원인을 찾아가며 무언가를 탓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일을 하자. 내일은 차를 수리해야겠다.
-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같은 후회를 반복한다. 나도 그렇다. 모든 사람이 그러진 않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이런 반복을 끊어보려고 사람들은 원인을 찾는다. 지웅 씨는 그렇게 원인을 찾는 게 ‘헛짓’이라는 거다. 강산에 아저씨의 신곡 ‘툭툭 탁’에 나오는 가사가 생각난다. ‘내가 삶을 살고 있는지, 삶이 나를 살고 있는지, 꿈이 나를 꾸고 있는지, 내가 꿈을 꾸고 있는지. 묘하고 묘하다.’ 나도 다음일을 하자. 내일은 아침에 좀 걸어야겠다.
4. 적막한 삶도, 소란스러운 삶도 마지막 일곱 번째 장면은 똑같이 죽음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혼자 죽는다.
- 유시민 씨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조르바가 혼자 우뚝 서서 죽는 모습이라고 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혼자 죽는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라는 거다. 자식이 있든, 없든, 누구나 혼자 죽는다. 일본의 선승이 쓴 한 줄 시 중에 이런 게 있다. “모두 절대 죽지 않을 얼굴을 하고 앉아있네!” 나도 죽는다. 어느 날 갑자기. 혼자.
5.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정한 거리감이라는 게 필요하다. 누군가에게는 열 보가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반보가 필요하다. 그보다 더하거나 덜하면 둘 사이를 잇고 있는 다리가 붕괴된다. 인간관계란 그 거리감을 셈하는 일이다. 인간관계가 어려운 것은 나와 너의 거리감이라는 게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누군가에게는 열 보. 누군가에게는 반보.
- 내가 가장 못하는 게 아닐까? 우정도 사랑도 너무 급했고, 퍼주었다는 생각을 한다. 정작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에게는 그다지도 차가웠고, 아무것도 주지 못해 놓고선… 산수와 수학은 늘 어려웠다. 그 거리가 열 보 인지, 반 보 인지를 알아내는 건 나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계산이었다.
이 책을 만나기 전의 나에겐 허지웅은 독선적이고 싹수없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지웅 씨는 솔직하고, 용감하게, 담백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다. 부럽다. 하지만, 부러워하는 마음에 머물지 않고, 나도 내 할 일을 해야겠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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