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는 이야기

좋은 형을 만났다. 형의 이름은 ‘네루다’.

타보 2020. 1. 14. 12:58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는 것일 테다. 어제 우연히 숙소에서 좋은 형을 만났다. 칠레 사람이고,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이다. 한 살 정도는 친구를 해도 되지만, 그래도 상대를 존중해 준다는 입장에서 '형'이라고 불러주기는 할 거다. 형희 원래 이름은 Ricardo Eliécer Neftalí Reyes Basoalto인데, 그냥 자기를 Neruda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자기가 파블로 네루다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러 달란다. 원래 이름이 너무 기니까 그냥 '네루다'로 부르기로 했다. 불러 달라는 대로 불러주는 것이 어쩌면 그 사람에게 가장 큰 선물이지 않을까? 

  형과는 이상하게 이야기가 잘 통했다. 생각과 느낌도 비슷했고, 음식 취향도 비슷했다. 나도 어차피 혼자 여행 하다 보면 쓸쓸할 때가 많으니 가끔 형과 놀기로 했다. 형은 내가 자기 뜻대로 해 주길 바라지 않았다. 무척이나 쿨 했다. 대신 내가 이야기를 걸면 언제나 진지하게 들어주고, 유쾌하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해 주었다. 형은 칠레 사람이었지만, 영어를 유창하게 사용했고, 나도 영어에 익숙해서 대화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형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었다. 방콕 카오산 거리에서 가끔 기타와 클라리넷을 연주하며 생활을 꾸려 갔다. 나도 군대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했고, 취미로 기타를 가끔 쳐서 우리는 더 쉽게 친해졌다. 형이 부르고 연주하는 수많은 노래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특히 O MUNDO É UM MOINHO (세상은 방앗간)을 좋아 했다. 

https://youtu.be/5Yz6cVjH4Ys

  나는 기억 못 하겠지만, 내가 어렸을 적 부모님은 저런 마음을 내게 전하셨겠지? 나는 왜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왜 무언가가 그리운 걸까? 네루다 형이 특별히 나를 위해 그런 건 아니겠지만, 형은 내가 그 노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자기의 공연 레퍼토리에 '세상은 방앗간'을 늘 끼워 두었다. 

 

  형과는 대화를 참 많이 했다. 형도 한국 문화와 내 이야기에 관심이 있었고, 나도 형의 음악과 이야기, 남미 문화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대화는 두세 시간을 넘길 때가 많았다. 여행에서 만난 친구와의 대화는 일상에서 만난 친구와의 대화와는 조금 다르다. 일상에서 만난 친구, 함께 커온 친구에게는 내 약점이나 나의 조금은 이상한 생각들을 말하긴 어렵다. 괜히 약점 잡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에서 만난 친구는 다르다. 같이 있을 때의 느낌만 나쁘지 않다면 훨씬 더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형과의 대화가 너무 재미있고, 좋아서 대화한걸 내 블로그에 올리겠다고 이야기했다. 형은 흔쾌히 그러라고 이야기 했다. 하지만,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남기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진이나 동영상은 너무 직접적이라서 싫다고 했다. 자기는 시처럼 여유와 공간이 느껴지는 것들이 좋단다. 자기의 삶이 그러니까. 나도 그 부분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나도 동의한다. 쉼, 여백, 여유, 여지... 아름다운 말이지만, 우리에게는 가까이 있지 않은 것들. 형은 그런 것들이 지켜지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상대방의 아름다운 삶은 지켜주는 게 맞는 거다.